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사(불멸의 그대에게) (문단 편집) == 기타 == 작중에서 대부분 처음의 소년의 모습으로 있는다. 늑대가 인간에 비해 시야가 좁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본인이 '몸이 가볍다'고 한 파로나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게 된 후에도 변신 능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소년의 모습이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기고 있거나, 맨 먼저 만난 소년을 계속 기억하는 것인 듯. 혹은 가장 오래 있던 형태라 편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변신을 했을 때 크나큰 특징은 '''눈동자.''' 설정상 변신한 대상과 완전히 똑같아지지만, 유일하게 눈동자만은 다르다. 작중 등장인물의 일반적인 눈이 아닌, 특유의 노란 홍채의 눈동자를 갖는다.[* 동물로 변신했을 경우는 예외. 늑대로 변신한 경우에는 특유의 눈동자를 가졌지만 독수리 리가드가 되었을 때에는 그 눈동자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상 작중인물이 불사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 불사신으로서 노커를 제외하고 모든 공격에 면역이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느낀다. 맨 처음 '아파'라는 단어를 습득한 후부터 공격을 받으면 계속 "아파"라고 되뇌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구가 칼로 그어 능력을 시험해 볼 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오니구마로 변신하는 것을 꺼리는 것 등. 때문에 투기장 3차전 상대로부터 왜 죽이지 않냐는 말에 "아픈 건 안좋으니까"라고 답한다. 자난다로 갈 때 배에서 인두로 지져지거나 바느질하며 바늘에 찔릴 때에 아파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투기장에서 얼굴에 도끼가 박히고 몸이 칼받이가 되도 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등 고통에 대한 반응은 일관되지 않다. 서양나팔꽃과 같은 수면제 종류의 약을 통해서 잠들어버리게 되어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야노메에서 수면 성분이 든 국수를 먹고 쓰러졌으며 다시 하야세랑 만났을때 수면침을 통해 잠들어버리게 되어 하야세를 죽일수 없었다. 다만 이러한 점도 어느정도 내성이 생겼는지 잠에 드는 시간이 이전에 비하면 줄어들었다. 토나리가 죽은 이후, 수많은 독과 약에 '''[[면역]]'''[* 내성이 아니라 면역이다. 마시면 30초만에 혀가 꼬여 죽게된다는 부자연꽃차를 마셔도 아무이상이 없었다.]을 지닌 토나리의 신체덕분에 독이나 약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불사의 감정적 부분은 마음으로나 지식으로나 아직 부족해보인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있고, 마치가 기뻐해줄거라는 "기대"와 "설렘"의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래도 [[슬픔]]이나 [[분노]], [[혐오]]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는 알고있는 듯. 피오란의 죽음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는 노커에게 '''분노'''했으며, [[하야세]]를 '''혐오'''했다. 두려움의 감정이 나온 적은 없었는데, 불사가 두려움을 느낄만한 상황은 무척 한정적이다. 애초에 죽지않으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결국, 불사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기 혼자만 남을 상황을 두려워할 것이다. > '''맞아... 잊고 있었어...''' > '''이건...''' > '''이 몸은 [[불사|내]] 것이 아니야...''' >---- > 카하쿠에게 고백받은 것에 거부감을 느껴 토를 하던 중 불사의 독백 70화 이후, '''[[사랑]]'''의 개념 자체는 알고 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불사]] 스스로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될 수는 없을 듯하다. 불사가 누군가와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육체]]'''가 필요한데, 여기서 문제는 <육체의 주인이 나(불사)처럼 같은 사랑을 했을까?> 이다. 하야세의 후손인 카하쿠가 불사에게 프로포즈를 했을 때, 불사는 말 그대로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하야세]]에게 잔인하게 죽임당한 [[파로나]]가 과연 저 카하쿠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전개에서 '''육체의 주인'''이 불사에게 감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구구와 만나고 4년 후 시점 이전과 이후의 캐릭터성의 변화가 크다. 4년 후 시점 이전, 즉 의사소통이 잘 안되고 자아가 생기지 않았던 시점에서는 신비로운 미지의 존재라는 분위기를 풍겼으나, 이후 자아가 생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성장물의 주인공으로 캐릭터성이 변했다. 또한 작품도 이전에는 불사 주변인물의 독백으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그 후 구구의 죽음 즈음부터는 불사 본인의 독백으로 작품의 주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불사가 계속 내적 갈등을 겪고, 주변인물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들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묘미. 이후 오랜시간 강철 감옥에 갇혀 쇳물에 살이 타버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재생시키는데,[* 본셴이 수염이 덥수룩해질때까지 갇혀있었으니 최소 몇달간 끊임없이 재생하며 1000도 가량의 쇳물에 삶아진 것이다.] 관찰자의 독백[* 구속된 채로 숨을 쉴 뿐. 그 시간 뒤에는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생물을 이렇다. 마치 호흡이 멈춰진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잊어간다.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에 따라 불사가 내면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여기서 '불사가 <대부분의 생물>의 범주에 속하는가'이다.] 노커에게 모습을 빼앗길 경우 빼앗긴 모습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겪은 일들은 모두 기억하지만, 그 기억속에 있던 사람(혹은 생명체)의 모습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마치의 모습을 빼앗겼을 때에는 마치의 모습으로 나무를 타고 오른 기억은 있지만 마치라는 이름과 그 모습은 기억하지 못했다. 79화에서 노커의 소굴로 들어가 싸웠으나 대부분의 모습들을 빼앗겨 버렸다. 다만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소년의 모습은 빼앗기지 않았다. 현대편에서 바다거북으로 변신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알을 낳고 울며 '이것이 사랑인가' 라는 기묘한 장면을 연출한 적이 있다. 이후 그 알들이 새끼거북으로 부화하고,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보며 토나리가 말했던 고통과 고난 또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개그성 연출같지만 불사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불사가 무언가를 낳거나 생식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시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